쇼펜하우어의 입을 빌리다
이영춘
*=사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그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쇼펜하우어-
강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결들이 속살거리는 소리, 셀로판지처럼 물결무늬 반짝이는 소리,
모래톱을 밟고 올라오는 물 알갱이들의 심호흡 토하는 소리, 심호흡에 맞춰 은빛 페달을 밟고 강둑을 달려가는 이이들의 웃음소리, 햇살을 차고 올라오는 물고기 떼의 은빛 아가미 팔딱거리는 소리, 소리의 입술들, 입술의 소리들이 노란 수채화로 뜬다
강가에 앉아 바람 소리 듣는다
나뭇잎들의 숨 쉬는 소리, 숨소리 뒤에 숨어 포르릉 포르릉 새들이 옮겨 앉는 소리,
날벌레 하나 물고 내 발밑을 빠르게 건너가는 개미날갯짓소리, 집 잃은 나뭇잎 하나 원 그리며 하늘을 긋는 소리, 물방아개비 풀잎에 앉아 바람의 날개에 음표 찍는 소리, 한 옥타브 올라가는 물방울들의 소리, 아, 소리, 소리들의 합창에 내 귀가 열리는 우주의 종소리
강가에 앉아 내가 내 소리 듣는다
땅에 발붙인 한낱 미물로 세상을 건너온 내 발자국에 대하여, 발자국에 고인 상처에 대하여, 남에게 뱉은 아픔에 대하여, 밥과 밥그릇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학문에 대하여, 서산 노을을 긋고 가는 기러기에 대하여, 내 심장에 정박한 슬픔에 대하여, 누군가 누워 있는 무덤에 대하여. 누군가 앉았다 간 빈 의자에 대하여, 가을을 싣고 오는 바람에 대하여, 바람처럼 건너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돌아갈 곳 없는 돌아갈 집을 생각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5월호 발표
이영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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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부에 열심이십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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